"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의 널리 알려진 이 말은
영화 <조커>를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온라인 곳곳에 남겨진 사람들의 리뷰를 읽어보니
공감가는 의견과 날카로운 비평들이 많았지만
필자의 마음을 가장 움직인 건 찰리 채플린의 저 문장이다.
영화를 본 뒤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지만,
먼저 저 메세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영화의 후반부, 아서 플렉이 어머니 페니 플렉을 질식사 시키는 장면에서 그는 이런 대사를 한다.
"난 항상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개같은 코미디였어."
필자는 이 장면이 무척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아서 플렉이 자신의 인생을 '타자화'하는 장면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서 플렉은 늘 스스로의 인생이 고달프다고 생각해왔다.
그가 일기장에 '내 죽음이 내 삶보다 가치 있기를' 이라고 썼던 것을 보면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자기 인생을 '타자화'해서 보기 시작하는 순간, 너무나 부조리해서 우스운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곤 부조리의 원인이 '타자'에게 있다는 이유로, 범죄의 책임 또한 자연스럽게 '타자'에게로 전가하게 된다.
그 결과, 더 이상 아서 플렉은 살인 후에도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가 진정한 '조커(Joker)'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그 동안 아서 플렉의 내면을 지배하고 통제하던 강력한 윤리는 '예의'였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
하지만 세상은 점점 미쳐가고 있었고,
아서 주변의 인물들은 대부분 아서에게 '무례'했다.
광고 피켓을 훔쳐 달아나고 그를 마구잡이로 구타하던 불량 청소년들,
버스 안에서 아이를 재밌게 해주려던 그에게 핀잔을 주던 여성,
아서의 입장 한 마디 귀기울이지 않고 해고를 했던 회사 사장,
지하철에서 시비를 걸던 세 취객들,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형식적 상담만 하던 사회복지사,
토머스 웨인의 저택 앞에서 그에게 꺼지라고 쏘아 붙이던 알프레드,
부자 관계를 확인하려 하자 경멸이 담긴 주먹으로 그를 후려치던 토머스 웨인,
본인의 위기를 떠넘기기 위해 아서를 배신했던 직장 동료,
순수하게 코미디언의 꿈을 좇던 그에게 공개적 망신을 준 머레이,
그리고 자신을 학대 방관했던 양어머니까지.
세상 사람들이 아서 플렉에게 대하는 '무례'에도 불구하고
그는 삶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했지만,
그러한 그의 신념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예의가 무너지는 '첫 순간',
그는 숨어 들어간 공중 화장실에서 여유롭고 우아한 춤을 춘다.
더 이상 '예의'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살 필요가 없어지자,
그의 마음이 한결 가볍고 즐거워진 것이다.
이질감이 들고 기괴하기도 했던 이 공중화장실 씬은
후에 나올 계단씬과 더불어 앞으로도 수없이 회자될 것 같은 명장면이었다.
그의 내면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붙잡아주기도 했던 윤리적 끈이 떨어지자,
순수한 꿈을 좇던 '몽상가'의 인생 또한 점차 병적인 '망상가'의 인생으로 변해간다.
그리곤 그의 인생이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리막길을 걷는 그의 인생은 전보다 더욱 당당하고 우아해졌다.
그 유명한 계단씬이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상징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서 플렉은 부조리한 세상을 바꿀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우발적이었던 그의 살인이 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난 뒤,
그가 마치 혁명의 불씨가 된 것처럼 시위대의 관심을 받게 된다.
늘 주변부를 맴도는 인생을 살던 아서가 드디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의 관심마저도 아서 플렉의 망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서 플렉을 조커로 만든 건 사회적 요인, 가정적 요인, 개인적 요인이 혼재해 있었다.
이 중 하나의 요인만 특정하여 부풀리고 과장하고 싶지는 않다.
더군다나 아서 플렉을 '인셀(Incel, 비자발적 순결주의자)'과 결부하여
젠더적 쟁점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매우 역겹기까지 하다.
이에 관해선 영화 속 인물구도를 되짚어 보며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고담시의 지원으로 상담을 받은 아서 플렉은 백인 남성이었다.
반면, 그에게 상담을 해주는 사회복지사는 흑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고담시의 복지예산 축소로 인해 상담소는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고,
아서 플렉은 더 이상 상담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사회복지사는 자신의 일자리를 잃어버릴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복지사는 아서 플렉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당신같은 사람의 사정 따윈 신경 안써요. 물론 나같은 사람의 사정도 신경 안쓰죠."
이 둘은 모두 고담시의 결정에 의해 불필요하다고 판단되어 내쳐지는 존재다.
그러한 결정 앞에는 '백인과 흑인'의 구분도, '남성과 여성'의 구분도 필요 없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이 영화를 젠더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건 비극이지만,
멀리서 그들의 양태를 지켜보는 건 무척 우스운 일이다.
이 영화가 정말로 세상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그 해석은 독자와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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