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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때에

by CADRIT 2020. 3. 20.

<해가 지는 때에>

 

 

해가 지는 때에 동쪽으로 걷는 자는

그림자를 마주보며 걷는다.

 

망막에 거꾸로 맺힌 상처럼

땅 위에 반대로 맺힌 상을 밟으며

한 걸음씩 뚜벅뚜벅 나아간다.

 

해가 지는 때에 동쪽으로 걷는 자는

지나간 과거의 잔상을 밟으며 걷는다.

 

시커먼 잔상은 감추어지지도 않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외면할 수도 없다.

 

해가 지는 때에 동쪽으로 걷는 자는

어둠이 가까이 왔음을 알고 있다.

 

한층 길어진 그림자가 엄포를 놓지만,

그의 걸음을 멈춰서게 만들 수는 없다.

 

해가 지는 때에 동쪽으로 걷는 자는

아직 오지 않은 일출을 꿈꾸지 않는다.

 

매일 뜨고 지고를 반복하는 해는

덧없고 유한한 세상의 권력과 같을 뿐이다.

 

해질녘, 마침내 그가 도착한 곳은

밥솥이 끓고 아이가 재잘대는 집이다.

 

 

 

 

 

 

*

 

 

아무도 이 시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 것이므로,

필자가 직접 풀이 및 해석을 써보고자 한다.

두 가지 버전을 적었는데,

독자의 선택은 세 가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1) 둘 중 마음에 드는 해석을 고르거나,

2) 제3의 새로운 해석을 낳거나,

3) 무시하고 지나가거나.

 

 

*

 

 

풀이/해석 - 1

 

일반적으로 빛과 어둠은 각각 긍정과 부정의 상징이다.

따라서, 해가 뜨는 동쪽은 긍정의 방향,

해가 지는 서쪽은 부정의 방향으로 해석되곤 한다.

작품 속 '그'는 해가 지는 서쪽을 등지고,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걸어간다.

따라서, 지는 해의 빛이 만들어내는 자신의 그림자와 마주 보게 된다.

해만 바라 보았을 때는 그림자와 마주할 수 없었다.

해를 등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해'는 그가 추구했던 '가치(사상, 이념, 종교 등)'를 뜻하며,

'그림자'는 그 가치를 추구함으로 인해 생긴 '근심'이나 '불행'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림자는 감추고 싶다고 해서 감출 수가 없다.

그는 동쪽을 향해 걸음을 계속해야 하므로,

그림자를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도 없다.

이러한 그림자는 어둠이 가까워 올수록 점점 길어지는데,

어둠에 대한 두려움조차도 그의 걸음을 막을 수는 없다.

그가 동쪽으로 걷는 이유는 새로운 일출을 꿈꾸어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내일의 해를 향해 걸어가고 있음을 부정하고 있다.

해는 뜨고 지고를 반복하는 '권력'과 같으므로, 

그 곳을 향해 걸어갈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마침내, 그가 도착한 곳은 그의 집이다.

밥솥이 끓고, 아이가 재잘대는 가정이다.

 

 

*

 

 

풀이/해석 - 2

 

작품 속 '그'는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고 있다.

그가 직업이 있는지 없는지는 시에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가 '생계를 책임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이라고 상정했을 경우,

해가 지기도 전에 퇴근을 한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이는 마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시를 읽으면서 실재의 사람을 상상하므로,

이것은 마치 '원본이 없는 이미지'와 같다.

그러나, '원본/이미지', '실재/가상'의 구별이 당신에게 중요한가?

그가 가상의 인물이라고 해서 허무에 빠질 이유도 없고,

그가 실존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진실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당신이 이 시를 통해서 무엇을 해석할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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