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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빌런이 말하는 용기

by CADRIT 2022. 4. 18.

경   찰   김빌런, 당신을 살인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변명의 기회가 있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으며, 체포적부심을 법원에 신청할 수 있습니다.

김빌런   허허... 자네는 누구인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와 함부로 내 삶에 침범하려는 건가?

 

경   찰   제주동부경찰서 고영웅 형사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인 죄로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김빌런   이보게 경찰관 양반.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를 체포해야 한다고? 터무니 없는 소리! 자네는 지금 인과론의 함정에 빠져있어. 자네는 이 곳에 오기 전부터 이미 날 체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를 체포하기 위한 갖가지 수단을 찾아낸 것 뿐이야.

 

경   찰   궤변을 늘어놓아 봐야 당신을 체포해야 하는 건 변함 없습니다. 현행 법률에 따라 당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마땅한 처벌을 받게 하겠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경찰서에 가서 합시다.

김빌런   허허.. 지금 자네가 죄라고 말하는 것들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자네 말대로 과거를 돌아보며 따져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야 하는 걸세. 찰나의 연속인 인생에서 춤을 추듯이 말이야!

 

경   찰   춤을 춘다고요? 당신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사회와 법이 인정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말입니다!

김빌런   어리석은 경찰이여. 우리 모두는 인정욕구에서 벗어나야 하네. 자네는 타인에게서 인정받기 위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쯧쯧.. 인생은 자기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 법이야.

 

경   찰   그럼, 당신은 다른 사람을 죽인 것을 잘했다고 생각합니까?

김빌런   나는 그를 도와주었을 뿐이야. 나와 그는 신뢰하는 사이였다네. 그는 죽기를 간절히 원했어. 지금 자네가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네가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야. 자네는 왜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을 하는가?

 

경   찰   됐습니다. 의미없는 이야기는 이 쯤에서 그만 두기로 하시죠. 더 이상 서로 시간낭비 하지 말고, 나는 그저 분부대로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김빌런   저런저런.. 자네는 왜 끊임없이 '자신'에게만 집착하는가? 결국은 지금 자네가 경찰 조직 내에서 인정받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닌가? 그렇게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는 삶이 자네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좁디 좁은 경찰 조직 안에서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네. 그게 자네가 사회에 공헌하는 일일세.

 

경   찰   헛소리 집어치워! 당신과 같은 범죄자를 감옥에 가두는 것이 사회에 공헌하는 거야!

김빌런   이보게, 나는 존재 자체로 귀중한 사람이네. 지금 자네의 경거망동한 언행처럼 누군가를 불신하고 감옥에 가두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일세. 인간은 늘 타인을 돕고 신뢰해야 하는 법이야. 자네는 내가 자네에게 무엇을 해줄 지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자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고 실천에 옮겨야 하네.

 

경   찰   그럼, 나보고 이대로 그냥 돌아가라는 말인가? 나보고 직무 유기를 하라고?!

김빌런   상관에게 혼날 것이 걱정되는건가? 자네한테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한 것 같군. 내가 지금까지 한 말들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자네가 스스로를 위한 인생을 살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자네를 위해 살아주겠는가? 타인의 평가에만 온통 신경을 기울이면, 끝내는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될 걸세. 자유란 본래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야.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것이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 명심하게나.

 

경   찰   들을수록 가관이구만! 미움은 당신한테 받도록 하지! 당신을 반드시 체포해서 감옥에서 평생 썩도록 만들어 주겠어. 

김빌런   이것 보게. 자네는 지금 나와의 관계를 수직관계로 보고 내가 틀렸다고 믿고 있으며, 내 삶에 개입하여 조종하려고 하지 않는가! 사실 알고보면, 자네는 스스로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나를 체포하는 것일 뿐이야. 본인의 속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게! 자네의 기만 행위가 스스로 부끄럽지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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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가 쓴 「미움받을 용기」를 읽게 되었다.

 

인과론을 목적론의 관점으로 바꾸는 법,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하는 법,

타인의 인정을 초월하여 자유롭고 당당해지는 법,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는 법,

존재 가치를 실감하고 공동체감각을 키우는 법,

인생이 찰나의 연속임을 알고 현재를 살아가는 법 등

 

책의 곳곳에 담긴 주제 의식들이 필자에게도 많은 생각을 일깨워주었고,

이 책이 수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의 제목처럼,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이 스스로를 옥죄는 생각의 족쇄를 벗어 던지고,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나가는 용기를 되찾는다면 좋겠지만,

필자는 책을 읽으며 정반대의 경우를 상상해 보았다.

 

만약, 어떤 범죄자가 책에서 말하는 주제 의식들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고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면 어떨까?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 필자의 상상이

위와 같은 짧은 대화글로 옮겨지게 되었다.

 

 

본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공저자의 말을 빌리면

이 책은 '기시미의 아들러학'과 같다고 했다.

 

다시 말해 '아들러 심리학'이 아니라,

기시미 이치로라는 한 철학자의 필터를 통해

걸러진 산출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저자의 주관적 견해나 해석, 신념 등이

책의 많은 부분에 개입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꼭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들러가 '개인심리학'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바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이 책 덕분에 아들러의 저서를 직접 읽고 싶어진 독자들도 있을 것 같아서,

만약, 그렇다면 이 책이 아들러의 '입문서'로서의 역할은 다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아들러의 저서를 직접 읽어 본 후 감상평을 써보고 싶다.

그 때는 지금과 생각이 어떻게 달라질 지 궁금하기도 하다.

 

*

 

글을 마무리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해본다.

만약,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이 국제 사회에 저질렀던 만행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오늘날의 일본 국민이 스스로에 대해서 존재적 정당성을 부여한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해야만 했을까?

 

혹시,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미움받을 용기'는 누구에게나 허용되어도 좋은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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